2022년 3월 19일 토요일

석가모니부처님의 장엄한 설법 장면을 공개

  

 

석가모니부처님의 장엄한 설법 장면을 공개

 

 

 

여기 부처님의 실존을 다시 한 번 믿을 수 있도

록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장엄한 광경을 공개합니

다.  여기서 부처님은 물론 보신불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는 먼저 깊은 삼매에 들어계십니

다.  드디어 부처님께서는 깊은 삼매에서 깨어나시어 양미간

에서, 눈에서, 입에서, 겨드랑이에서, 손에서, 무릎에서....

필요에 따라 몸의 10군데서 무량광-- 억종광 또는 백종오색

광이라고 하는 청정하고 아름답고 영롱하고 예쁘고 안팎이

없는 빛을 방광하여 수많은 국토를 다 비추면서 한 곳에

머물러 아름다운 구름 운대를 만들어놓으십니다.

 

  천녀정토에서는 꽃비를 내려 불세존의 설법을 축하하고

하늘 땅의 삼천대천세계는 여섯 가지로 진동을 하여 경축

과 장엄의 분위기를 더합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주

법계의 성자들이 법문을 듣기 위해 오십니다.  생사윤회를

벗어난 해탈오계의 수많은 보살들과 아라한들, 하늘세계를

관장하시는 제석천왕, 하늘의 왕들1-6하늘 등이 청법 대중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시는데 그 미묘하고 청아한

목소리는 자비가 뚝뚝 흘러내리는 자비의 음성으로, 보시

바라밀음 지계시라바라밀음 정진 인욕 지혜의 음성으로, 해탈

성자의 음성으로, 사자후의 음성으로 들립니다.  부처님의 눈

매, 일거수일투족은 청정한 삼매의 빛, 지혜의 빛이 역력합

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삼천대천세계 모든 성자들이 다 들을

수 있게도 하고,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우리 부처님께서 보신불로 무수히 많은

화신불을 내어 여러 불국토를 옮겨 다니시면서 설법하시는

장면을 간단히 소개해 드립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이야

기이며, 이것은 진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남섬부주 지구와 그리고 지구와 유사한 세

계에 사는 중생들을 위해 보리수 아래서 대정각을 이루어

적정삼매에 드시는 수많은 부처님의 화신불을 보여주십니

다.  그러시면서 그 보리수 밑을 떠나지 않으시고, 즉 육신

의 화신불을 놓아두신 채 보신부처님은 도리천궁으로 가서

설법하시고, 도리천궁에 다시 부처님의 화신불을 놓아두시

고 보신불은 야마천궁으로 가서 설법하십니다.

 

  이때 삼천대천세계의 도리천과 유사한 수많은 국토에 둔

화신불들은 각각 그 세계에서 설법을 하십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도솔천, 타화자재천으로 옮기면서 계속 설

법을 하십니다.  이때 상품보살들도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똑같이 화엄법문을 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희유하

시고 거룩하시고 삼매, 신통에 자유자재하십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요해

 

 

 

 

2022년 3월 16일 수요일

무량광 발견(無量光 發見)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화엄의 세계를 이 시대에 다시 누군가가 이야기한다며 세상에서 그를 믿어줄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현상계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믿음’이 문제인 셈이다. 이 믿음의 문제는 영산 당시에 부처님께서도 끝없이 시달린 문제였다.

 

 교단 내부의 수행자들의 불신(不信)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의심병은 아상(我相) 때문이다. 초각의 경지에서 약간의 맛을 보고 마치 모든 것을 얻은 것인 양 차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사항은 대승경전에 수없이 언급되고 있는 일이다.

 

 세존께서 “내가 찬양한 칠불여래(七佛如來)의 명호와 공덕은 모든 부처님의 매우 깊은 경계라서 실로 알기 어려우리라. 너는 의심하지 말아야 하느니라.”라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때 아난존자는 “부처님! 저는 의심하지 않사옵니다. 그러나 모든 중생은 믿음이 부족하여 여러 부처님의 지극히 깊은 경계를 듣고도 ‘어찌 한갓 칠불여래의 이름만 염송해야 하겠어. 


그것만으로 그렇게 큰 공덕과 이익을 얻는다고 하겠어’ 라고 생각하여 믿지 않고 비방하옵니다. 그래서 덧없는 한 세상에 큰 이로움과 즐거움을 잃고서 모든 악도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 법문은 칠불의 이름만 염송해도 그 공의 얼마나 큰지를 설한 것으로 <<약사경(藥師經>>에 나오는 내용이다. 영산 당시 아난은 상수보살의 경지였다. 그런 아난에게까지도 부처님께서 ‘믿음’이란 인식의 문제를 확인했어야만 하는가 의문을 갖게 한다. 붓다는 아난의 믿음을 의심한 것은 아니다.

 

 이 질문 자체를 대중에게 물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실례일 뿐이다. 부처님께서 불과를 이루신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세계를 설하실 적마다 예외 없이 제기된 것은 ‘믿음’의 문제였다. 


믿음이 문제되는 것은 아난의 지적처럼 ‘비방’으로 이어진다는 데에 있다. 비방은 엄청난 과보를 받게 된다. 그래서 삼지삼청(三止三請) 이 나왔던 것이다.

 

 공자는 평생동안 천하를 주류하였다. 춘추시대는 그의 진정한 정치철학을 현실과 괴리문제를 내세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세상은 양자가 아니면 묵자한테로 간다.” 는 맹자(孟子)의 푸념 또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유가사상(儒家思想)의 세(勢)란 바람 앞에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역사는 성인을 ‘믿음’으로 평가해 주었지만 당 시대는 ‘비방’으로 빛을 가리게 한다 비구니를 수행자 반열에 세우고자 한 것 도 아난의 지혜였지만 당시 교단은 그것만을 갖고도 그를 따돌림하였다.

 

 지혜는 과거의 반추를 통해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성인은 지혜의 상징물로서 그가 제시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미래일 뿐이다. 미래는 현실이 안주를 담보하는 무형의 재산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더구나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믿음은 미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개개인의 인식 여하에 따라 그 가치를 달리한다.

 

 진불 출현(眞佛出現) 또한 세상의 따돌림이 따르고 누리꾼들이 비방을 일삼게 된다. 누구를 기리고 비판하는 것이나, 누가 참이고 거짓인가 가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고유한 권리가 아니다. 


근거에 의한 기림이고 비판이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지만, 만약 전체 분야에서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호도하는 것은 절대 용인될 수 없는 일이다.

 

 자재 만현 큰스님이 만약 참이 아닌 가짜라면 그가 저서에서 밝힌 오도송도 분명 어딘가에 허점이 있어야 한다. 


다름 아닌 불교사상의 맥락에서 그 맥을 같이 하지 못하는 필연의 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 텍스트를 분석하여 무아설(無我設)과 진공묘유설(眞空妙有設)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話頭打破頌

 

 다겹생(多劫生)의 업(業)의 나무 무성하더라
 팔만사천 가지마다 줄기마다
 망상 꽃이 피었더라
 내 이것을 송두리째 뽑아 버렸더니
 하늘도 없고 땅도 없더라

 거짓몸뚱이 산산이 부셔져
 가루되어 없는데
 착(着)할게 어디 있는가
 마음 마음
 본래부터 없는 것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네

 

 이 글은 아난의 후신인 자재 만현 큰스님이 화두를 타파하고 공(空)을 체험하는 순간 읊은 오도송(悟道頌)이다. 이런 글귀는 조사어록(祖師語錄)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자재 만현 큰스님만의 언어일 뿐이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 큰스님께서 공을 철견하시고 그 희열 을 노래하신 것이다.

 

 당시 오도(悟道)의 순간을 큰스님께서는 “며칠 화두가 잘 들리더니 <<금강경(金剛經)>>을 큰소리로 봉독하던 중에 여래는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고, 또한 가는 데도 없다는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온몸이 폭발하듯 하면서 세상이 확 뒤집혔습니다.”라고 술회하신다. 화두 타파(話頭打破), 여기까지는 기존의 선지식들과 똑 같은 경험을 하신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많은 선사(禪師)들의 시(詩)를 보아왔다. 그 가운데서도 오도송(悟道頌)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사실 세간살이의 모습을 읊은 것이야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에서 보면 모두 한갓 망상을 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의 무상함을 백천 번 노래한들 그 무상이 실상화 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끝 간 데서 자신이 오도의 희열로 나오는 소리, 그게 바로 오도송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가 부정되는 맨 끝자락의 언어와 비언어의 세계가 만나는 바로 그 곳에서, 다시 무아의 언어로 나오는 소리이다. 


때문에 언어의 세계를 부정하는 오도송처럼 우리 뇌리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가끔씩 기존의 오도송을 모방하여 흉내내는 선사도 있지만, 자신의 언어가 부정되는 천둥보다 무서운 소리 끝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오도송은 언어의 시체 썩은 냄새만 풍길 뿐이다.

 

 이 짧은 텍스트가 주는 신서함은 그동안 언어의 인식 속에 갇힌 우리의 좁은 의식을 일순에 우주 밖으로 내팽개쳐 드넓은 세계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텍스트 분석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이 글을 분석하면, 인간 육신과 영혼의 참모습을 가장 과학적으로 설명한 글이 바로 이것이다. 영산 당시 부처님 수기(授記)로 금생에 오신 붓다의 오도(悟道)가 아니고서는 이런 작품은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먼저 기절(起節)을 살펴보면 오욕(五慾)으로 가득 찬 우리 육신을 ‘업(業)나무’에 비유했다. 여기에서 만약 단순한 업나무만으로 우리 육신이 갖고 있는 문제를 견주었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절름발이 빗됨 밖에 되지 않는다. ‘다겁생’, ‘팔만사천’, ‘망상’의 수식어는 이 인간의 몸뚱이를 가장 논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겁생’은 무한한 시간을 상징하는 말이다. 사실 이 생의 우리 육신이 거친 시간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그 간격을 잴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우주의 모습이 과거와 다르고 그 진행의 속도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을 드러냄에 있어서 ‘다겁생’이란 말이 가장 적합한 말이다 업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팔만사천’에 비유한 것은 우리 번뇌가 가질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의미한다 붓다의 팔만사천의 법문도 이것을 뿌리 삼아 설하였다 고한다.

 

  ‘망상’이란 말을 가지 끝에 핀 꽃의 수식어로 삼은 것, 또한 팔만사천의 번뇌를 달리 이름 붙인 것이다. 불가(佛家)는 ‘염화미소(拈華微笑)’를 비롯해서 꽃과 많은 인연을 갖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무상한 사물의 본질을 설함에 있어 꽃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꽃은 화려하지만 그 생명은 아침 이슬처럼 매우 짧다. 그런데 이 망상의 꽃은 연꽃의 덕성을 상징하는 개부구족(開敷具足) 처럼 꼭 열매를 맺는다. 만약 그 꽃에 망상의 열매가 맺으면 세세생생 육도윤회를 돌아야 하고 무아의 열매가 달리면 이것을 벗어날 것이다. 


번뇌망상 없이는 과(果)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일 터이다. 하지만 꽃은 꽃일 뿐이다. 할 저녁에 만리장성을 쌓기도 하고, 하루 저녁에 석숭의 부를 축적하는 것도 망상이다. 하지만 ‘그 실체(實體)는 없다’는 것이다.

 

 승절(承節)은 ‘존재의 근원을 철견’하는 대목인데 시간으로 따지면 대반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마음 속을 온통 채우고 있는 무성한 꽃잎의 업나무는 이 세상에 고정된 실체란 하나도없는 것임에도 그것을 있는 것처럼 속게 만든 장본인이다. 


수억 겁 동안 자생의 생명력을 길러온 이것을 모조리 뽑아버렸다는 것, 역시 대선지식(大善知識)의 통쾌한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저 단순하게 뽑아서는 각(覺)이 될 수는 없다. 실뿌리 하나하나까지 뽑아내지 않으면 무아(無我)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잔뿌리에 붙은 실뿌리 하나만 남아도 “하늘도 없고 땅도 없더라.”란 말은 그 생명력을 잃게 된다. ‘내’라고 하는 주체는 공의 세계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이 글 전체에서 이것을 조명하면 더 없는 강조형이다. 


업나무에 대한 상대 주체를 ‘내’라고 내세움으로써 모조리 뽑아서 버리는 행위자를 부각시킨 것이다. 그래서 대오(大悟)는 이렇게 한 치 한 푼의 어긋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전절(轉節)은 ‘무아(無我)’를 가장 적나라하게 설한 것이다. 무아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거짓 정보에 놀아나는 인식의 주체 가 없다는 것이다. ‘거짓몸뚱이’는 기절의 ‘꽃이 무성한 업나무’와 맥을 같이 하는 말이다. 


지금 그 거짓 정보에 놀아났던 인식의 꿈을 깬 순간 ‘산산이 부서져 가루로 없어졌다’는 것은 팔만사천의 꽃이 떨어지고 비로소 무아의 열매가 맺었다는 것이다. 30년이 지나 이루어지는 자재 만현 큰스님의 불과는 여기에서 그 씨앗이 발아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읊은 “착할 게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은 마지막 뒷마무리를 하는 말이다. 결절(結節)에 해당하는 부분이 갈무리가 아니다. 화두 타파의 무아 공을 이루는 행위는 여기에서 이미 끝난 것이다. 이 말을 되돌려 보면 업나무를 무성하게 만든 것은 결국 ‘착(着)’이라는 것이다.

 

 업(業)이란 범어로 카르마(karma)라고 하는데 고대인도 언어로 ‘행위’라는 뜻이다. 행위의 이면에는 신(身)이 있고 구(口)가 있으며 의(意)가 있다. 이것을 이름하여 삼업(三業)이라 한다. 겉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표업(表業)이라 하고 속으로 감추는 것을 무표업(無表業)이라 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윤회(輪廻 sasra)를 일으키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착(着)’이란 무아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큰스님 저서 후기는  “있는 그대로를 보라. 분별하지 말라. 끄달림, 집착, 머묾 없이 보라 .”고 충고한다. 단지 “인연 따라왔다가 그 인연 다하면 사라지고 마는 것”인 데도 스스로 생각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이러한 고리를 비로소 바로 정견(正見)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절(結節)은 그 실상을 본 순간 ‘이것이 아니었구나’라고 그간에 허상에 속은 어리석음을 노래한 것이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말하면 기쁨인데, 자재 만현 큰스님의 적정삼매(寂靜三昧)의 오도송(悟道頌)에서는 ‘환희’라는 말을 쓰고 있다. 


마음은 이 업나무 육신을 지배하는 주인이다. 본래부터 비어서 붙을 것이 없음에도 팔만사천 가지의 꽃을 피워 온갖 밖의 사무에다 그 향기를 뿌려댔고 그것도 모자라 갖은 유혹으로 그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필자는 모든 성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허물을 너에게 돌려라’라는 말을 갖고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을 고민하였다. 물론 이 말뿐만이 아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경학(經學)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논어(論語)에 나오는 “삼 년 동안 아버지의 뜻을 바꾸지 않아야 비로소 효라 할 수 있다.”는 대목도 이해하지 못하다가, 선친(先親)을 땅에 묻은 그날 저녁에야 비로소 알았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말을 맺자면 내 존재 자체가 허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내 인식의 주체가 나라는 인식 없이 행한다면 상대도 허물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소리는 ‘내 탓이요’라는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절(結節)에 ‘마음’이란 단어가 3회에 걸쳐 나온다. 하지만 그 성격은 전혀 다르다. 앞의 겹쳐 있는 ‘마음’은 양면성을 갖는다. 하나는 중생들이 인식하고 있는 마음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각자가 이해하고 있는 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시각에 따라서 인식하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세 번째 나오는 ‘마음’은 진정한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무착무아(無着無我)의 공(空)이다.

 

 육신이 공하다는 사실은 화두 타파를 하는 순간 어느 수행자라도 체험하는 일이다. 오도하는 수행자 누구라도 희열에서 춤추고 손뼉치며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필자가 접한 오도송에서 이처럼 과학적인 논리 구조를 갖고 육신이 공함을 설한 것은 지금까지 없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 오도송은 금생에서 이루어진 진공묘유의 적정삼매송을 그 복선으로 깔고 읊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눈 여겨 볼 대목은 업식(業識)으로 가득찬 육신의 공함을 터득하고 난 그 이후의 행동 양식이다. 둘째 대목의 ‘뽑다’는 행위는 아직은 버릴 것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것이다. 


여기에서 만약 그 행위만으로 마무리가 되었다면 토굴에서 죽비를 더 맞아야 한다. 이것만으로는 오도송(悟道頌)이라 할 수 없다. 시를 논평할 적에도 분명 문제로 삼게 된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셋째 대목의 ‘부서져 가루 되다’는 말은 이 글의 생명의 열쇠와도 같은 것이다. 굳이 그 가치를 따진다면 천금 만금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 글의 구도 또한 기승전결로 나뉘어져 있으므로 ‘부서져 가루 되다’는 것은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두 가지 행위 모두 완전한 공(空)을 이루기 위함이다. 어디 한 구석에도 착(着)이 붙을 곳이 있으면 그것은 무아(無我)가 될 수 없다. 뽑아서 가루로 부셔 날려 버려야만 비로소 공(空)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는 문제의 제기에서 업나무 형태를 매우 세밀하게 그린다. 팔만사천의 망상 꽃이 피었으면 팔만사천의 열매가 나와야 한다. 만약 이 글에서 열매에 관한 언급이 없다면 이 텍스트는 생명이 없는 것으로서 그야말로 쓰레기일 뿐이다. 


필자가 이 텍스트는 공을 과학적인 구조로 설명한다고 하는 것은 공을 연결시키는 고리가 더 이상의 치밀함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대목의 ‘망상’, 둘째 대목의 ‘거짓’, 셋째 대목이 ‘본래부터 없는 것’은 모두 육신의 ‘공’함을 의미한 말들이다. 이 수식어들의 주체 ‘마음’이라는 것이 바로 팔만사처 꽃의 ‘열매’에 해당한다. 모든 불경(佛經)의 모두(冒頭)에 나오는 말,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존재가치(存在價値)를 다시 한 번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출처/21세기 붓다의메시지 존평

펴낸곳/현지사-영산불교사상연구소

 

2022년 3월 14일 월요일

불과를 증한 붓다만의 세계_무아 속 절대계


불과를 증한 붓다만의 세계_무아 속 절대계

 

 

 

거룩하고 위대하신 우리 부처님께서는 결국 스승 없이 홀로 시공時空 유무有無를 초월한 무아 속 절대계인 니르바나, 열반의 세계를 찾아드셨습니다.

 

깊고 깊은 적정 속에 펼쳐진 무릉도원입니다. 완전히 시공을 초월한 대열반, 대해탈의 붓다 세계입니다. 이 절대계는 열반의 빛, 억종광 아니면 뚫을 수 없는 진리 자체의 무아 속 절대계, 상적광세계입니다.

 

불과를 증하지 않고선 들어갈 수 없는 환희의 지복의 세계입니다.

 

무량겁 이래로 붓다를 이루신 부처님의 청정법신들은 바로 이곳에서 대적정광光삼매에 들어계십니다. 억종광으로 계십니다. 


이것은 불과를 증한 분 이외에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며, 부처님 이후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예수,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 미라래빠, 사라하, 아짠문, 달마, 혜능 그 누구도 이경지에 들지 못했습니다. 다만 수보리‧사리불 존자만이 불과를 증하여 알았습니다.

 

 

 

 

부처님의 깨끗하고 청정한 무량광명 빛_억종광, 


백종오색광, 대열반광

 

≪10만송 반야바라밀다경≫에는 여러 페이지Pages에 걸쳐 붓다보신불 몸의 각 부분들에 대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그의 머리, 양손, 두 발 심어지 열 손가락에서 빛이 방사되어 세계 구석구석까지 도달한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경에서는 전 우주적인 몸이 육체적인 형태를 띠고, 절대계에 반영된 32상 80종호를 갖추고 있는 지복의 몸보신불을 그리고 있습니다.

 

보신부처님에 대한 신체상의 거룩한 특징과 깨끗하고 청정한 억종광명 빛으로 이루어진 불신에서 대적정삼매의 힘으로 빛을 방사하시는 희유하신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무를 초월한 무아 속 절대계에 여여히 계시는 붓다님들의 불신은 무량광명‧억종광명‧대열반광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누차 법문한 바 있습니다.

 

붓다는 그 티끌 수 같이 많은 색깔의 광명을 마음대로, 가령 단색으로든 오색으로든 억종의 색깔로든 필요한 용도에 따라 방사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안팎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하고 영롱한 광휘를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원광圓光과 배광背光 - 신광身光 역시 임의로 크게도 작게도 하며 광도를 천문학적 수준으로 밝게 할 수도 있습니다. 불신 그대로가 억종광명의 빛덩이가 되기도 합니다. 어떠한 외도의 수장들도 붓다의 억종광은 흉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도 원광, 배광, 신광을 냅니다. 그러나 외도의 빛은 투명하지도 않고 단색일 뿐입니다.


붓다는 완전한 빛의 존재이십니다. 그것도 투명하여 예쁘고 청정한 백종오색광명 자체인 것입니다.

 

외도의 수장首長들이 인신을 받아와서 그들의 최고 수행을 통해 허공에다 빛으로 된 자기의 체외신體外身_허공신, 양신을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체외신은, 밀교 바르도의 보신정광명과 화합한 의생신과도 같이 정법佛法의 진정한 보신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허공이나 바르도 중음계中間界는 시공時空 안의 공간입니다.

 

시공을 초월한 무아 속 절대계, 곧 연화장세계에 두는 무량억종광명으로 이루어진 붓다의 지복의 보신과는 천지 차이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에 편만해 있는 대생명, 공, I AM - 과 계합, 합일한 붓다는 그 공 속에 있는 우주의 무진장한 보물을 내 것으로 했기 때문에 항하사의 신통 묘용으로 이를 화학적으로 조합해서 무엇이든지 만들어낼 수 있으십니다.

 

이번 음력 7월 칠석절에 치성광여래부처님께서 우리 현지궁 현지사 1,000여 명 신도분들에게 감로수 병에 위신력으로 만드신 안팎이 투명한 알약 한 알씩을 넣어주셨습니다. 번뇌를 줄이고 몸의 병을 치유하는 약을 그곳 정토의 감로수에 넣어주셨습니다.

 

부처님 세계는 100% 내외명철內外明徹_안팎이 없음한 억종광명의 세계이기에 거기 존재하는 붓다의 궁, 금강좌, 컵과 같은 기물, 알약 등 모두가 안팎이 없이 투명합니다. 그대로 상적광의 세계인 것입니다.

 

 

 

출처/21세기 붓다의 메시지 2권

미륵부처님에 대한 소식 / 칠구지불모왕불 대준제보살님

          미륵부처님에 대한 소식

 


 

미륵부처님은 정식 불명이 미륵선광불, 해위등왕

불, 보시등광불이며, 도솔천 내원궁에 계십니다.


  여기서 미륵부처님에 대한 중대한 소식을 선포합니다.  미

륵부처님은 인도 영산 당시에도 계셨고, 불멸 후 900년경

무착시대에도 잠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무착은 미륵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유가사지론> 등 유

식가의 5대부론을 썼으며, 불의 삼신설을 정립하여 그의

<섭대승론> 등에 담았습니다.  


미륵부처님은 불기 3000년경

에 사바세계에 다시 오셔서 불법을 중흥하고 중생을 제도

할 것입니다.

 

 



 칠구지불모왕불 대준제보살님

 

 

준제보살님은 모든 부처님들의 어머니 역할을 하

십니다.  그래서 광명 만덕, 자재 만현 큰스님이 계시는 이

곳 현지사에 와 계십니다.  


좌보처는 법상불 지혜보살이고

우보처는 현지보살이 대행하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과 동일 인격체가 아님을 다시 밝힙니다.

 사바세계에 현신하실 때에는 왕비 차림을 하시며 위엄이

대단하십니다.

 

 

 

출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요해

펴낸곳/현지궁 현지사-영산불교사상연구소